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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나씨조상님중에 유명하신분 몇분 올립니다...
나경운  2007-07-13 03:50:50, 조회 : 6,095, 추천 : 1289

나중우
  
○ 본 관 : 나주(羅州)
○ 호 : 낙천와(樂天와)

어릴적부터 천성이 곱고 강직했으며 문장과 학문이 뛰어났던 공은 능히 천하를 다스릴만한 재주와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1362년 고려 공민왕(恭愍王) 11년 공이 문과(文科)에 급제한지 얼마 안 되어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자 공민왕은 정치와 민간의 이해득실을 사실대로 아뢰게 하는 한편 시중(侍中) 홍언박(洪彦博)을 시관(詩官)에 임명하여 과거를 치러 인재(人材)를 뽑게 하였다. 거기서 33명의 뛰어난 선비가 뽑혔는데, 그 가운데 공은 병과(丙科) 16번째로 급제하였다. 그 후 전교시령 겸 춘추관편수관(團敎侍令 兼 春秋館編修官)을 거쳐 예문관 지제고(藝文館 知製誥)에 이르렀다.
1367년 공민왕(恭慾王 16년) 왕이 학교(學校)가 황폐해 짐을 근심하고 이를 다시 일으킬 생각으로 목은(牧隱) 이색(李德)을 대사성(大司成)으로 기용하여 생원(生員)의 수를 늘리고 포은 정몽주(圃霧 鄭夢周)와 자은 이숭인暇匈隱 李崇仁)을 다른 관직에서 교관(敎官)을 겸하여 가르치도록 했는데, 공도 경서(經書)에 밝다 하여 교관(敎官)이 되었다.
공은 날마다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함께 명륜당(明倫堂)에서 경서(經書)를 나누어 가르치니, 학도가 모여들어 배웠으며, 이 때부터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번창하였다.
1398년(恭讓王 六年)에 관(館)과 사(寺)가 궁밖에 있음을 타당치 않다고 생각한 공은"예문관은 사명(詞命 :왕의말과 명령)을 맡은 곳이요, 춘추관(春秋饍)은 기사(記事)를 맡은 곳이며, 전교(典敎)는 사전(史典)을 맡아 축문(祝文)을 쓰는 곳이니, 이 삼자(三者)가 중사입니다. 그래서 선왕은 관을 궁중(宮中)에 두었는데, 지금은 관과사가밖에 있어 선왕의 제도에 어긋났으니, 지금부터 사관(吏官), 한림(한林) 2인과 전교 1인을 궁내(官內)에 들어와 근무케 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소서." 하고 공양왕에게 상소하였다. 공양왕은 사리에 밝은 공을 크게 칭찬하고 공의 청대로 시행하였다.
이렇게 공의 뜻하는 바가 이루어지고 차츰 이름이 세상에 알려질 무렵이었다. 이성계가 힘없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朝鮮)을 건국하였다. 그러자 공은 벼슬을 내던지고 김제군 입천면 내호리(金堤郡 立川面內弧里-현재 김제시 신풍동 내기 「안터))로 내려와 나라 잃은 설움을씹으며 묻혀 살았다.
그 후 공의 사람됨을 잘 아는 이성계가 세 번이나 우의정(右議政)을제수하고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으면서 자손들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섬기는 법이 아니라고 힘주어 가르치면서 지제고(솟製誥)나 신주(神主)에도 그렇게 쓰라고 이르고 어떤 경우에도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
이런 공이 세상을떠나자 태조(太祖) 이성계는 애도의 뜻을 표하고부조를 전하면서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묘는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42번지에 있고, 공이 살던 터에는 현재 팔효사가 서 있다.


나득강

* 본관: 나주(羅州)
* 이름: 나득강
* 출생: 1378년(고려우왕 4년) 낙천와(樂天瀉) 중우(仲佑)의 아들로 태어남.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몸가짐이 단정하였으며 문예(文藝)가 뛰어나 일을 이루려는 의지가 강했다. 이 태조가 임금이 된 후 아버지 낙천와를 우의정으로 임명하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별세하니 그 때 공의 나이 열 여섯이었다.
공은 상례(喪禮)를 다하여 3년 복을 입은 후 1396년(太祖 5년) 향시(鄕試)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된 후 1419년(世宗 1년)에 등과(登科)하여 이듬해 권지저작(權知著作)으로 통사랑봉상녹사(通仕郎奉常緣事)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계공랑직장(啓功郎直長)으로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를 겸하고, 1422년(世宗 4년)에는 선무랑(宣務郎)으로 외직인 임피현(朧陂縣)을 맡았다가, 이어서 선천(宣川)과 오천(汚川) 두 고을 군수를 역임하니 이르는 곳마다 백성을 잘 다스려 칭송이 자자하였다.
1424년(世宗 6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셔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3년을시묘하였고, 1427년(世宗 9년)에 통예문봉예랑(通禮門奉禮郎)이 되어 한성참군(漢城參軍)을 겸하고 이어서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製誥) 이조좌랑(吏嘗左郎) 함길도경력(成吉道經歷)을 거쳐 봉훈랑군기판관(導訓郎軍器判官)으로 배임하니 그 명성이 조정에까지 널리 퍼졌다.
1431년(世宗 13년) 11월에 예조공랑(禮普功郎)이 되었다가 전농소윤(典農少尹)을 거쳐 봉상소윤(奉常少尹)으로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로 승진되었으나 뜻이 없음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세종 임금이 공을 끔찍이 사랑하여 은권(恩眷)을 융성하게 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겸세자시강원찬선(資憲大夫 吏曺判書兼世子侍講院贊善)으로 임명했으나, 병을 핑계하여 이에 응하지 않다가 1444년(世宗 26년) 12월 3일에 6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세종 임금이 슬퍼하시고 부제(賻祭)를 후히 하사하였으며 이듬해에 김제시 백산면 하리 북조산 아래 예장(국장수준의 장례식) 하도록 명하였다.
공의 묘를 쓴 주산(主山)이 평지임으로 산을 쌓고 못을 파서 수세(水勢)를 돕게 하니 이 산을 '조산'이라 하고 못을 '나소제(羅所堤)'라 부르고 있다. 공의 자손 수천 명이 김제를 비롯하여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나협

* 자 : 사우(去遇)
* 호 : 주은(酒隱)
* 출생지 : 경기도 반송정(盤松亭)

공의 자(字)는 사우(士遇)요, 호는 주은(酒隱)이며 낙천와(樂天萬)중우(仲佑)의 6대 손으로 경기도 반송정(盤松亭)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기품이 있고 용모가 단정했던 공은 남달리 총명하기까지 하여 세 살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율곡(栗谷) 이이(李珥) 문하에서 수학하고, 아울러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으로부터 학문과 덕을 쌓았다.
공은 1575년인 선조(宣祖) 8년에 성균관 생원(生員)에 급제하였다. 그 후 여러 번 벼슬이 올라 1607년(선조 40년)에는 남대지평(南臺持平)이 되어 임금께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릴 세 가지 방책을 상소하였는데, 첫째는 도학을 숭상함이 선비의 길이요(崇道學 以正士趙),
둘째는 항상 절약하고 검소함을 나라에 널리 펴며(尙節儉 以 國用),
셋째는 어진 인재들을 많이 등용하여 요직을 줘야 한다(收賢才以供天職)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선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다가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왕위에 오른 지 9년이 되던 1617년 대북(大北)의 정인 홍(鄭仁弘)이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려는 음모를 꾸미고서 공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굽힘이 없이 부당함을 성토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공은 벼슬을 버리고 선대(先代)의 고향인 김제로 돌아와 정사(精舍)를 짓고 후학(後學)을 가르치며 인재를 양성하는데 몰두하였다.
1624년 인조(仁祖) 2년, 임금이 다시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몸에 병이 있다는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오직 경학(經學)에 전념하여 남은 여생을 보냈다.
1634년(인조 12년) 경기도와 호남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경기도 이천(利川)에 사당을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소실되었고, 752년(영조 28년)에 유림들이 다시 뜻을 모아 이 곳 김제에 지음서원(芝陰書院)을 세우고 받들어 모셨다.


  나팔기

* 호 :월암(月崙)
* 출생지 :김제군 신풍동

공의 자는 숙거이고 호는 월암(月岩)이며 절충장군 환의 아들로 나주나씨 금양군파 응정의 현손(玄孫)이다.
1623년(仁祖 1년) 지금의 김제시 신풍동 내기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문학과 무예가 출중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651(효종 2년)년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고 사헌부 감찰을 거쳐 남포현감을 지내다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효종이 공의 재행(才行)을 사랑하여 희천 군수로 부르고 이듬해에 곡산 군수를 임명 했는데 가는 곳마다 백성을 사랑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또 제주목사 겸 판관이 된 1년 후 병환으로 퇴임 하였다가 다시 죽산(竹山)과 곡산(谷山) 도호부사, 또 상와,대구 양진영 장을 하였다.
효종은 북쪽 국경을 넘나들며 노략질하던 오랑캐를 무찌르려는 뜻을 세우고 8도에서 가장 힘이 센 8명의 장사를 뽑는데 당당히 공이 뽑혔다. 그 가운데에서도 서습예로 선출되어 금원에서 총과 칼을 수백정 묶어 들어보라 하니 달려들어 안은 채 휘두르며 용맹을 떨치니 효종께서 보시고 8장사 중 제일이라며 어깨를 잡아 주며 「보국순절의 중양지재 (中良之才)」라 하였다.
그 후 임금님이 잡아준 어깨라 하여 귀(貴)히 싸고 다녔으며, 효종께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니, 국가의 충성된 장사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76년(肅宗 2년)에 세상을 떠났다.
공의 묘소는 김제시 신월동 갈촌마을 서쪽 산에 있으며, 공의 뜻을 기리기 위해 김제군 백산면 학산서원에서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나신도
  
○ 자 : 입부(立夫)
○ 호 : 월곡(月谷)
○ 출생지 : 1568년 (선조1년)에 현재의 김제시 신풍동

공은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했고 지략과 용맹이 뛰어나 1594년(宣祖 27년) 27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1596년(宣祖 29년)에는 장인인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岳馬節度使) 최호(崔湖)와 함께 충청도 홍산(洪山)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받고 절충장군(折衡將軍)으로 함경도 병마우후(成鏡道 兵馬虞候)를 제수받았다.
공은 이듬해 7월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 경상좌수사 최 호등과 함께 진해(鎭海)에서 왜적과 싸웠는데, 한밤중에 적의 기습을 받자 이억기는 물에 뛰어 들어 자결하고 모든 병졸이 흩어졌다. 그러나 공은 홀로 남아 병졸들을 다시 정비한 뒤 적과 끝까지 싸워 크게 공을 세웠다. 공의 행적이 호남 절의록에 실렸는데, 충성스러움과 용맹함이 뛰어났다고 하였다.
향당(鄕堂) 사람들이 백산면의 학당서원에 배향하였으며, 묘는 김제군 신풍동에 있다.


나형

○ 자 '공보(共寶)
○ 호 '월재(月齋)
○ 출생지:현재의 김제시 신풍동에서 태어나 월촌면 신월리에서 살았음

공은 병마우후(兵馬漢侯)를 지낸 나신도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어질고 예능방면에 재주가 뛰어났다. 또한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즐겨 함으로써 무예에도 뒤따를 자가 없을 정도였다. 1618년(光海需 10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정략장군(定略將軍)으로 선전관(音傳官)을 지냈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남에 전라병사(全羅岳使) 김준룡(金俊龍)과 합세하여 경기도 용인(龍仁) 싸움에서 전공(戰功)을 세웠다.
이 싸움에서 공은 수백의 적을 쏘아 죽였으며 다시 충청도 정세규군(정世規軍)을 도와 적진 가까이에 나무로 울타리를 쳐 도망 못하도록 가두어 놓고 공격, 적의 보짐을 빼앗아 수백명을 베었다. 그 후 적과 화의가 이루어져 싸움이 끝나게 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시짓기와 글씨 쓰기로 낙을 삼으며 살았다.
공의 사적은 호남창의 록과 실록(資錄)에 기재되어 있고, 묘는 월촌면 신월리에 있다.


나안인

* 자 : 가거(可居)
* 호 : 정옹(靜翁)
* 출생지: 김제시 신풍동

선생은 서기 1478년 김제시 신풍동에서 태어 났다.
어려서부터 천성(天性)이 어질고 착했으며 효심이 지극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애를 잘하고 이해 심이 많았으며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고 형식(形式)을 아주 싫어 했다.
집이 가난하여 모든 것이 부족하였으나 모든 것을 참자고 스스로 호(護)를 내빈(耐貧)이라 하고 가난을 참았으니 가난이 아니라 하였다.
서기 1513년 8년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하고 효심의 지극함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그 내력을 알고 참봉(參奉)이라는 벼슬을 내리었으나 벼슬을 받지 않고 집에서 부모님에 효도하고 시(詩)짓기를 즐거움으로 삼았다.
선생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작으로 집을 짓고 서실겸 접대용으로 활용하였으며 화초(花草) 가꾸기와 집안 청결에 남다른 관심이 많았다. 선생은 아들 응진(應辰)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유고로는 '내빈공유고(耐貧公遣稿)'라 하여 팔효집(八孝集)에 합철되어 있는데 잡저(雜著)라는 글 등이 저술되어 있다.  


나응참

* 자 : 중장(仲章)
* 호 : 구산처사(龜山處士)
* 출생지: 김제시 신풍동

선생은 서기 1505년 김제시 신풍동 504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터 기품(氣稟)이 정수(精粹)하고 문예와 학행이 뛰어났다.
선생은 14세 때 벼슬길에 오르려고 서울에 있을 때 충암 김공과 금헌 이장곤 등이 선생의 학문과 재주를 칭찬하였다. 선생은 19세 때 벼슬길에 오르니 시관(試官)이 벼슬하면은 장래 불행하여질 것이라며 과제를 뺏어버리니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선생은 이때부터 벼슬길로 입신양명하여 공명을 얻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효도와 학문에만 힘쓰며 훈몽(訓蒙)에만 전심하였다. 그 후에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까지 나서지 않았다.
선생은 서기 1564년 명종 19년에 4차례나 상소(上疏)하기를 "이단의 불교를 물리치고 우리 도를 밝히시어 한결 같은 정신으로 중도(中途)를 잡으소서" 하고 상소하니 명종(明宗)임금이 아름답게 여기시어 실로 하늘이 돕는 힘이라 이르시고 특히 구산처사(龜山處士)라는 호와 어병초화(御屛秒晝)에 성명과 상을 그려서 하사(下賜)하셨다.  


  나응허
  
* 자 : 장원(章元)
* 호 : 행정(杏亭)
* 출생지: 김제시 신풍동

선생은 서기 1502년에 김제시 신풍동 508번지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았으며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이 극진하였다.
서기 1537년 中奈 32년에 당당히 성균생원(成均生員)을 하고 효자로써 천거되기도 하였으며, 다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으며, 그 후 조산대부 청주목판관겸 청 주진병 마절제 도위 (朝散大夫 淸州牧判官兼 淸州鎭兵馬節蹄尉)까지 지냈다.
선생은 안동 김공응상(安東金公應商)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어 1남 1녀를 두었으며, 다시 계배인 고부 이공형집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을 두었다.
서기 1592년 10월 9일 생가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명리(名利)나 입신(立身)에는 뜻이 없고 후진들에게 가훈(家訓)을 가르치고 글을 읽으며 글씨로 소일했다.
유고((遺稿)로는 '행정공유고(杏亭公遺稿)'라 하며 팔효집에 합철(合綴)되었으며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시(詩) 등이 저술되어 있다.          

      
나표
  
* 자 : 사진(士眞)
* 호 : 절효(節孝)
* 출생지: 김제시 신풍동 508번지

선생의 할아버지는 건계(建溪)선생이며 아버지는 구산처사(龜山處事)이고, 어머니는 진사남평 문공명서(眞士南平 文公命瑞)의 여(女)에 이어 계배 사과 나주 양공성기 (繼配羅州梁公成紀)의 따님사이에서 서기 1539년 (中宗 34년)에 김제시 신풍동 508번지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순정(純情)하고 부모님 마음만을 위하고 부모님들이 즐거웁게 생활(生活)할 수 있는 일에만 정진하였으며 벼슬이나 입신(立身)하려는 뜻은 두지 않고 오직 성현들이 지키고 가르쳐온 그대로 살았다.
선생은 두 아들을 두고 오직 글공부와 효행만을 가르치고 집에서 글 읽기만을 즐기며 아이들이나 가르치며 효(孝)와 충(忠)에 대하여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그가 1626년 88세로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 모두가 효행과 적선을 흠망(欽望)하며 돌아가신 분 앞에 엎디어 우는 조문객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한다.
유고(遣稿)로는 문(文)과 시(詩)가 팔효지에 합철되어 있다.  
  

나한명
  
* 자 : 군탁 (君悼)
* 호 : 영이당 (永怡堂)
* 출생지: 김제시 옥산동 15번지

선생은 서기 1735년 영조 11년에 김제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후하고 영리하고, 학문이 깊어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는 물론 경서(經書)까지 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자 모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루고 계모의 상을 맞아서도 똑같이 지극한 정성을 보이니 사람들이 칭송하엿다. 부친이 돌아가시어 장례를 지내는데 큰 비가 내렸으나 오직 장지에만 비가 내리지 않는지라 사람들이 공의 효성을 하늘이 아시는 까닭이라고 크게 감동하였다. 장례 후에 3년 시묘를 하는데 십리나 떨어진 집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초막에 다니며 모든 정성을 다했다.
그 후 공이 과거를 보러 서울을 가는 밤중에 도적을 만났으나 그가 오히려 공을 알아보고 길을 안내하여 주며 그 효행에 감복하고 있음을 말했다고 전한다.
선생은 성리학을 강론하니 선생이 크게 장허(漿許)하였을 정도로 탐구용학(探究庸學)하며 고문(古文)에 침잠(沈潛)하여 어렵(漁獵) 10권과 역대론(歷代論) 8권, 이수론(理數論) 3권을 저술(著述)하였다.
선생은 장수 황공세열(長水 黃公世烈)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두고 지내다가 서기 180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순조 무자춘(純祖 戊子春)에 명정(命龍)하였는데, 문간공 송치규(文簡公 宋穉圭)가 정려기를 찬(撰)하였고 판서 이익회(判書 李翊會)가 썼다.
고종조에 증통훈대부사헌감찰하고 다음해에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위도총부부총관하고 용암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시문유고(詩文遺稿) 4권이 가장(家藏)되었다.  
  

  나처대

공은 1714년 (淵宗 40년) 10월 28일 김제군 장신리에서 낙천와(樂天窩) 중우(仲佑) 12세손으로 태어났다.
공의 자는 대여(大汝)요 호는 희음재 (希音齋)이니 나주인이다.
공의 어머니 태산경씨 (泰山景氏)의 태몽에 새우가 용이되어 하늘에 오르는 것을 보았는데 과연 공의 천품이 총혜(聰慧)하고 골상(骨相)이 빼어났다.
공은 어려서 말을 배울때부터 천지(天地) 두글자를 불렀고 아흡살때에 시를지어 읊으니 보는이 놀라와 하였다.
16 세때에 옥병계 윤봉구(玉屛溪 尹鳳九)의 문하에서 수학할때 스승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들었으며 희음재(希音齋)라는 호를 주어서 부르게 되었다.
공은 부친의 병환에 잉어가 종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냇가에 가니 개울물이 말라 없는 것을 보고는 하늘에 기도하며 정성을 다하니 별안간에 잉어가 뛰어나와 약으로서 효험을 보았다.
공은 사친이효하고 형우제경하며 학문에 매진하여 대성(大成)하였다. 향유가 선생의 효우 학행(孝友 學行)을 천관(薦官)하여 1778년 (正祖2년)에 조정에서 정릉참봉(靖陵參奉)을 제수 받았고 이어서 온릉참봉(溫陵參奉)을 거쳐 선공봉사 겸자문감역(繕工奉事兼紫門監役)으로 특천되었다.
소임(所任)을 마치고 지병으로 귀향하여 행본효우(行本孝友)와 학구성리 (學究性理)의 도를 닦고 여러 제자를 교육하는데 전력하였다.
향유(鄕儒)가 김제 지음서원 (芝陰書院)에 매년 향사하고 있다.


나덕헌(羅德憲)

1573(선조 6)∼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나주.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 아버지는 이성현감(尼城縣監) 사침(士#침07)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휘하에서 종군하였다.
특히, 안현전투(鞍峴戰鬪)에서는 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 봉해졌다. 외교적 수완이 능하여 여러 차례 심양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길주목사(吉州牧使)를 거쳐 1635년에는 창성부사(昌城府使)·의주부윤을 역임하고, 1636년 춘신사(春信使)로 다시 심양에 갔는데 동지(同知) 이확(李廓)과 심양에 도착하자,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황제(皇帝)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때 우리나라 사신에게도 경축반열에 참석하라고 하였으나, 하례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옷이 찢어지고 갓이 부서지는 구타를 당하였다. 구타와 회유를 거듭하여도 시종 거부하다가, 청나라가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주어 돌려보내기로 하자, 내용을 알기 전에는 받을 수 없다고 받지 않았다.
100여명의 기병으로 통원보(通院堡)까지 호송되었는데, 기병의 호위가 풀리자 통원보의 호인(胡人)에게 국서를 맡기고 귀국하였다. 이 사실을 안 삼사(三司)와 조복양(趙復陽)을 중심으로 한 관학유생들은 황제참칭(皇帝僭稱)의 국서를 받았다 하여 논핵하였다.
영의정 김류(金#유15)까지 가세한 조정의 거센 척화론으로 위기에 몰렸으나,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의 적절한 변호로 극형만은 면하고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과거 춘신사로 심양에 가서 하례를 거부,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유배에서 풀려나 삼도통어사로 특진되었으며, 1639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나위소(羅緯素)

1583(선조 16)∼1667(현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 자는 계빈(季彬). 아버지는 현감 덕준(德峻)이며, 어머니는 증판결사 황현(黃顯)의 딸이다.
1616년(광해군 8)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 1) 개시문과(改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형조좌랑 등을 지내고,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재직중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을 도와서 무기와 군량의 조달에 힘썼다.
뒤에 호조정랑 겸 기주관·직강·사예·임천군수를 거쳐, 1634년 예조정랑·태상시첨정·상의원도정을 역임하였다.
1636년 이후로 풍기군수·원주목사·사예·태상시정 등을 거쳐 경주부윤에 이르러 고향으로 내려갔다.
만년에는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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